예고 없이 나타나는 건 비 뿐만이 아니다.

WR. 고은

 

 

 

 

 

“마지막으로 날씨를 전해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케츠노 아나?”

“네, 케츠노 아나운서입니다. 현재 에도 곳곳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는데요, 이번 주 내에 만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 지, 만! 호사다마라고 하죠? 안타깝게도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언제 올지는 몰라요? 모쪼록 잘 대비하시길 바래요. 특히, 거기! 업무 때문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당신! 곧 썩어가는 폐품마냥 하품하는 당신! 언제 올지 모르는 건 비 뿐만이 아니랍니다! 우산을 꼭 챙기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그럼 저는 이만!”

 

 

“얼레? 저거 완전 히지카타 씨 아닙니까? 썩어가는 폐품, 히지카타 씨?”

티비를 보던 오키타는 손으로 히지카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옆에서 푹 꺼진 눈을 겨우 뜨며 하품하던 히지카타는 곧 입을 다물었다.

“아아. 대비는 늘 하고 있다, 아나운서 양반. 양이지사 놈들을 베어버릴 대비라면 말이야.”

“헤에, 글쎄. 지금은 꼬질꼬질하게 때 묻은 빨랫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냄새난다구요?”

오키타는 코를 쥐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스프레이를 뿌렸다.

 

“아악, 눈! 네놈, 그거 살충제 아니냐!”

“에-, 해충은 박멸해야죠. 죽어, 히지카타.”

히지카타는 오키타가 뿌리는 스프레이를 막으려 손을 마구 휘저었다.

“어이, 소고. 그만해라. 안 그래도 썩어가는 쓰레기에 스프레이를 뿌리면 불난다고?”

복도에서 히지카타와 오키타를 본 곤도는 방으로 들어와 오키타를 제지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곤도 씨. 그거 결국 내가 쓰레기라는 소리잖아.”

“하하하하. 그런가. 아무튼, 너도 좀 쉬엄쉬엄 해라. 가끔은 네 몸도 좀 보살피라고.”

“이게 다 당신들이 말썽을 피워놓으니까 생기는 일이잖아! 꼭 내가 일부러 일을 찾아서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워커홀릭 같은 거 아니거든?!”

“그래그래, 토시. 알겠다고. 그런 의미에서 대원들하고 벚꽃 구경이라도 가려는데, 어떠냐?”


“하아? 미안하지만 난 됐수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겠어.”

“그러지 말고, 토시. 기분전환도 할 겸 말이야.”

“그래요, 히지카타 씨. 진짜 썩어 뒈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나야 좋지만.”

“아, 그래. 썩어 뒈지고 싶으니까. 한 발자국도 못나가겠다고, 지금.”

“흐음, 그러냐. 알겠다. 그러면 서류는 그만 보고 오늘만큼은 쉬어라.”

 

곤도는 히지카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히지카타는 그것이 기운 내라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그는 곤도와 오키타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빨리 들어가 눕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했다.

 

 

잠시 뒤, 둔영 마당이 소란스러워졌다. 대원들이 신에 겨워 떠드는 소리가 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후우, 신났군.”

그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방문에서 돌아누웠다. 그래, 빨리 가라.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곧 그들이 나간 건지, 그가 잠에 빠진 건지 바깥소리가 아득해졌다.

 

 

 

“세상모르고 자는군.”

말하는 낮은 목소리에 옅게 웃음이 배었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타카스기는 히지카타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는 제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들었다. 사락, 옷감끼리 스치는 소리가 가볍게 귓가에 맴돌았다. 그 때, 그의 손목이 붙잡혔다.

“자는 사람 옆에서 피울 셈이냐.”


히지카타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갤 돌려 타카스기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깼군.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면, 가려고?”

히지카타는 타카스기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붙잡힌 손목을 내리며 타카스기는 작게 입 꼬리를 올렸다.


“글쎄. 가길 바라는 건가.”

“그게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흐응?”

타카스기의 말에 히지카타는 얼른 일어나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타카스기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뭐.”

“대답은?”

“아니지, 당연히.”

그제야 타카스기는 만족한 듯 표정을 풀었다. 히지카타도 덩달아 표정이 풀어졌다.

“언제부터 온 거냐.”

“글쎄.”

“위험하다. 네 신분은 알고 들어온 거냐?”

“흐음. 내 신분을 알고도 만나는 넌. 위험하지 않은가?”

타카스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거야…. 아무튼, 사람들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 나가지.”

 

히지카타는 눈을 슬쩍 피하더니, 이불을 걷고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타카스기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여기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만.”

 

그러더니 그는 히지카타를 제게 끌어당겼다. 잠이 깨긴 했지만 몽롱함이 가시지 않았던 히지카타는 힘을 줄 새도 없이, 타카스기의 품에 안겨버렸다.

 

“읏! 무슨 짓이야?!”

당황해서 목소리가 커진 히지카타는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타카스기는 다른 한 팔로 그의 배를 감싸 꼭 끌어안았다.

 

“꼭 싫은 것처럼 구는 군.”

 

타카스기는 제 입술을 히지카타의 목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 위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덕에 히지카타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으읏, 그런 건. 흐으.”

“그런 건?”

“흐읍, 거기에 입술, 대고, 으응. 말하짓, 마…흐응….”


타카스기가 살짝 고개를 돌리자, 새빨개진 귀와 입술을 깨물며 제 숨소릴 막는 히지카타가 보였다. 그것이 못내 사랑스러운 양,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기다고 웃어?!”

“귀여워서.”

“아앙?!”

“…”

 

타카스기는 대답이 없었다. 히지카타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타카스기는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히지카타는 그 눈에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아차, 싶은 그는 멍해진 제 입을 다물려고 했다.

 

“흡…!”

 

그의 입을 막은 것은 타카스기였다. 그는 히지카타에게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갑작스레 숨이 막힌 히지카타는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깊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진정을 한 것처럼, 커다래진 눈을 감으며 타카스기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흐응….”

입술을 떼자 히지카타가 얇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타카스기에게 기댔다.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다.”

한 글자, 한 글자에 그의 심장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 소리가 온통 저를 가득 채워서, 되려 제 심장이 더욱 쿵쿵대는 히지카타였다.

 

 

“이제 정말 올 것 같군.”

타카스기는 슬며시 제게서 히지카타를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지카타는 이미 방문 앞에 선 타카스기의 등 뒤로 다가갔다.

 

“가는 거냐.”

“그래.”

“…타카스기.”

 

한 발 내딛으려는 타카스기를, 히지카타는 불러 세웠다. 그리고 한 발짝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싫어한다는, 그런 게 아냐. 사랑한다, 내가 더.”

 

그를 감싼 팔에서 심장이 뛰는 울림이 전해졌다. 타카스기는 조용히 손을 올려 그의 손을 감쌌다. 꼭 쥔 손에서 따뜻함이 퍼졌다.

 

이제는 정말 보내야할 때였다. 히지카타는 아쉬운 듯 천천히 제 팔을 풀었다. 타카스기는 방문을 열었다.

언제 온 건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냄새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땅은 이미 젖어있었다. 그 위를 흐르는 빗물을 타고 벚꽃이 춤을 추었다.

 

“비가 꽤 내렸나보군.”

타카스기가 중얼거렸다. 그 사이, 히지카타는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

“가져가라.”

그는 그것을 받아들 것처럼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우산을 지나쳐 히지카타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돌려주러 오마.”

 

 

조용히 귀에 속삭였던 타카스기는, 붙잡을 새도 없이 그를 떠났다. 히지카타는 멍하니 그가 있던 자리를, 또 그가 지나간 자리를 내다보았다. 하나하나 온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아나운서 말이 맞군.”

약속 없이 찾아와, 기약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비도, 너도, 그리고 우리도.

 

쉬이-, 바람이 한 번 불었다. 그 덕에 꽃잎이 흩날렸다. 팔랑이며 날갯짓 하는 나비처럼, 바람을 탄 것처럼 자유로이. 바깥을 흐릿한 풍경 속, 저들만이 유난히도 분홍빛을 발했다.






---

Posted by 은후글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