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공백(上)

WR. 고은

 

 

 

 

“타카스기, 머리 좀 잘라주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조금 관리하기 힘들어졌거든, 요즘. 자꾸 엉키고 여기저기 걸리기도 하고.”

“흐음. 이리 와봐.”

 

갑자기 찾아와서는 가위를 들고 하는 소리가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늘 묶고 다니던 놈이 웬일로.



그가 내 곁을 지나 내 앞으로 와 앉는 사이, 주변 공기가 그의 향기에 젖어들었다. 언제 맡아도 좋은, 그립고도 설레는 향기.

그는 별다른 잔소리 없이 ‘아, 너무 짧게만 하지 말아주게.’ 하면서 가위를 건넨다.


 

“나한테 맡겨도 괜찮겠냐? 미리 말하는데 머리 자르는 거 처음이다.”

“괜찮다. 끝만 다듬어줘도 돼.”

 



순순히 제 뒷통수를 맡기는 걸 보면 나를 얼마나 믿는 걸까. 그것이 괜스레 안심되는 건 나도 그만큼 바보인걸까. 

빗질을 하는데 쓸어내리는 그 감촉이 좋다. 그래, 이것도 좋아했지. 여기에 파묻고 하루를 보내도 좋다 생각했었다.

 


 

“머리카락에 손을 댄 적은 거의 없지 않았나.”

“잘린 적은 있어도 직접 다듬겠다고 한 적은 없었지.”

“언제, 잘린 적이…. 아,”

“그래. 니조 그 자식 덕에 잘려봤지. 살인귀 니조라더니 변태 니조가 아니냐.”

“…”

“타카스기?”

 


 

서걱서걱, 머리 끄트머리를 자르면서 그의 머리가 짧았었던 때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니조, 그 남자를 부린 것도 결국 나였지. 그 때 그런 식으로 또 다시 끔찍한 이별을 만들어 버린 것도 나였다.

 


 

“타카스기? 무슨 생각하나?”

“어? 아.”

“지난 일 아닌가. 이제 괘념치 말게. 머리카락이야 계속 자라지 않는가. 그 때 이후로 이만큼 자라서 나는 자네한테 온 것이고.”


“누가 그렇대냐. 그냥 이 부분에서 어떻게 자르면 되나 고민했을 뿐이야.”

“말 돌리기는.”

 


한 때 그 예쁜 머리카락을 잘리게 한 내게, 이제는 길어졌으니 손질해달라는 너도, 나도 참 우습다. 목선을 드러냈던 머리칼이 허리 끝에 오기까지 우린 얼마나 많이 갈라지고 엇갈렸을까.

 

 

 

“다 되었는가?”

“으응. 이 정도면 대충.”

“대충이라니, 마음을 담았어야지. 그 때처럼 또 짧아졌으면 어쩔 건가?”

“…”

“호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뒤에서 움직이던 손이 멈추자 즈라는 근처에 있던 거울로 엉덩걸음을 쳤다. 요리조리 거울을 보더니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 웃는 낯을 녀석에겐 보이기 싫어, 얼른 고개를 내리고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쓸어 모았다. 그것들을 가위와 함께 옆으로 치워두려는데.

 

 

“어? 어어?”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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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했던 애가 전혀 몰랐던 사이에 여자친구와 다정한 셀카를 찍어 올렸다.

 

 

 

 

WR. 고은

 

 

 

 

[오늘부터... 우리는♡]

 

 

“이것 좀 보게, 긴토키.”

“뭘.”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내가 타카스기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말이야. 근데 이게 대체 무엇인가!”

“뭐긴, 그거네 그거. 우리 오늘부터 사귑니다~ 잘 봐주세요~ 특히 너, 이걸 보고 있는 너. 우리 잘 어울리죠?”

“대체 어느 순간부터? 어디서? 어떻게? 왜 만나는 거야? 왜 타카스기 군,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었지? 왜 나는 하나도 몰랐던 거야? 이 여자애 누구야? 긴짱 알고 있어? 타카스기 군, 이제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겠다는 거야?”

“내가 알겠냐! 왜 갑자기 사춘기 여고생 모드?”

“이제 어쩌면 좋지? 히잉….”

 

 


카츠라는 잔뜩 죽은 얼굴을 테이블 위로 떨구어버렸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또 핸드폰을 켰다. 턱은 테이블에 그대로 박아둔 채 계속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오~ 드디어’, ‘ㅊㅊ’, ‘잘 어울린다!’ 따위의 댓글들이 가득했다. 이 패턴이 반복되기를 십 여분 째. 카츠라는 이제 원망 섞인 목소리였다.

 


 

“타카스기 자식,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거야? 왜 너도나도 다 축하해 주는 거냐고!! 절대로 용서 못해. 축하 따위 절대 못한다고!!!”

“‘군’에서 언제 ‘자식’으로 바뀌었대. 대체 네가 용서 못하면 어쩔 건데. 애초에, 타카스기 얘가 너한테 관심이라도 줬냐? 관계 발전의 건더기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있, 있었…. 있었을지도 몰라!!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안 날 뿐이야. 있었지 않았을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있어. 있어야해. 있어줘라. 있니? 있…”

 

 

 

과거회상에 갇혀버린 카츠라의 모습에 긴토키는 웃음이 났다.

“안쓰러워서 못 봐주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포기해.”

“포기라니!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직접 물어보기라도 할 거야?”

“으으. 조, 좋아. 직접 물어볼 거야. 이 귀로 똑똑히 들을 거라고. 긴토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제대로 대답 듣고 올 테니까.”

“흐응, 그러시던지. 근데 말야. 네가 원하는 대답 못 듣고 오면, 이번엔 내가 물어볼 거다, 너한테.”

 

 

 

카츠라는 긴토키에게 두 눈 도장을 쾅 찍고서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긴토키가 했던 말을 듣고는 나간 건지, 확인할 새도 없이 자리를 떴다. 뭐가 그렇게 급하기에 달려나가는 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그는 중얼거렸다. 


긴토키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카츠라를 좇았다. 아니, 만날 때부터 봤던 그를 시선 한번 거두지 않고 계속 좇았다. 오자마자 시켰던 딸기 파르페가 처음 그대로 녹아가고 있었던 것도 모를 만큼 중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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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후글쓴다 :

[긴츠라] 수박 사 주세요.

2016. 6. 19. 23:25 from 은혼

 

 

 

 

수박 사 주세요.

즈라른 전력 60분 연성

WR.고은

 

 

 

 

 “긴토키, 수박 먹고 싶다.”

 “어.”

 “시원한 수박 먹고 싶어.”

 “응.”

 “수박 먹고 싶어.”

 “어.”

 “수, 박.”

 “으아아아악! 저리 떨어져!”

 카츠라가 희번뜩해진 눈으로 긴토키에게 매달리자 긴토키는 질색을 하며 카츠라의 팔을 떼어놓았다.

 “더워…. 긴토키, 수박.”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온 구멍에서 땀이 나오는 날씨였다. 내리쬐는 햇빛에 살갗은 타들어갈 것 같았다. 바람이라도 차게 불면 좋으련만, 아니면 차라리 불지나 말지. 야속하게 그것마저 뜨거운 온도를 실어 날랐다.


 카츠라는 내내 부동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렇게 있으면 시원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그 옆에서 긴토키는 퍼질러 누워있었다. 손가락조차 까딱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더위는 누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고갤 돌려보니 카츠라는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 그러면서 수박타령을 하는 것이었다. 수박귀신이 들린 것 마냥 징징대는 소리에 긴토키는 이제 귀에 수박이 자라날 판이었다.

 

 

 “그렇게도 먹고 싶으면 니가 사와!”

 “그렇지만, 응? 밖은 덥기도 하고, 이대로 나가면 곧바로 증발해버릴 것 같고, 그도 아니면 아스팔트 위에 구워진 고기마냥 될 것 같단 말일세. 그런데도 날 내보낼 셈인건가? 아, 나 같은 거, 귀찮구나. 더운 날 고작 그 수박 하나가 뭐 그리 어렵다고 나를 사지로 내몰려는 거지? 알겠어. 갈게. 이 문 밖을 나서서 그대로 황천길로 가면 되는 거지? 하아.”

 카츠라는 퀭한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긴토키를 쳐다보았다. 긴토키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카츠라를 내려다보았다.



 “황천길 같은 소리. 안 그래도 더운데 귀찮게 시리. 간다, 가. 너도 따라 와.”

 “에? 나? 왜 나? 싫은데요. 저는 죽고 싶지 않은데요. 긴토키씨가 갔다 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카츠라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자긴 절대 밖으로 안 나가겠다는 심보였다. 눈이 뒤집혔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긴토키가 그랬다. 실성한 건지 이성이 날아가버린 건지 아니면 굉장히 화라도 난 건지, 어찌 되었든 카츠라는 제가 실수했다는 걸 구구절절 느꼈다. 긴토키는 카츠라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카츠라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렇단 말이지.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내 짜증 다 받아주겠단 얘기지? 더위를 먹어도 단단히 먹었구나. 그렇지, 이열치열 알지? 실내 온도랑 체내 온도 똑같게 해줘? 더위 먹고 하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주랴? 어? 이런저런 것들 다 감당 할 수 있단 거지? 평소하고 전혀 다른 자세로 임하겠다는 거잖아, 지금 얘기?”

 

 

 카츠라는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날이 더우니까 나는 땀이겠지? 그럴 거야. 그렇지 않을까? 카츠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아등거렸다. 그놈 참, 힘은 또 왜 그렇게 센지. 미동도 없었다.



 “저, 저기 긴토키.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하하, 일단 진정하고 앉아서 얘기해볼까?”

 “진정? 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얘기겠죠? 네, 원하신다면야 지금 당장이라도.”

 “기, 긴토키!”

 

.

.

.


 “긴토키, 이따가는 꼭 사주는 거지?”

 “으이구, 수박귀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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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후글쓴다 :





마피아도 의뢰를 한다.

은혼 심야 전력 60분 연성

WR.고은





  “다음 소식입니다. 러시아의 신흥 마피아 조직의 일원들이 붙잡혔습니다. 이들은 민간인을 납치, 감금한 혐의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


  한가로운 토요일 저녁이었다. 해결사 사무실도 간만에 조용했다. 카구라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긴토키는 늘상 그렇듯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신파치와 함께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말을 멍하니 흘려듣던 신파치는 마피아라는 말에 귀를 귀울였다.



  “마피아라니, 이 나라에도 있을줄이야. 긴토키씨, 마피아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마피아? 그거 뭐냐, 참치회사냐? 불꽃 나오는 반지를 낀 애들이 조직원인 그런 거?”

  “참치라뇨! 그거 어디 누굽니까, 예? 전혀 아니라구요. 쪼끄맣게 생긴 애가 자기를 가정교사라고 하면서 누구를 보스로 만들려는 그런 조직 아니라구요!”

  “신파치, 지금 네가 다 말했는걸?”

  “에? 아, 아무튼! 마피아라는 건 실제로 매우 위험하다고요. 마약이니, 살인이니 야쿠자보다 더 치밀하고 조직적이라니까요.”

  “그거, 우리를 말하는 것인가.”




  신파치가 열을 내며 마피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와중에, 전혀 다른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긴토키와 신파치는 순간 온 몸이 굳어졌다. 그들은 신경을 바짝 세우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들 뒤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4명이나. 그의 눈은 그들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신파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아,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구. 당신들을 어떻게 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글쎄 말이야. 남의 집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면 가택침입죄라고? 경찰에 끌려가고 싶어? 당신들 친구들처럼 조사 받는다고?”

  “그래, 그 친구들 때문에 온 것이다. 여기, 해결사 사무소지?”

  “네?”



  그 뒤에 있던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긴토키와 신파치는 황당해했다.



  “뉴스를 봤으니 알겠지. 우리 조직원들이 지금 경찰서에 잡혀있는 이유, 납치 및 감금은 그들이 한 게 아니야. 오히려 그들은 당했어, 다른 조직에게. 하지만 그놈들은 자신들이 한 짓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고 사라졌다. 조직에 도움을 청하면 좋겠지만 상황이 곤란해져서 말이야. 게다가 그 민간인, 당신들 친구 아닌가?”

  또 다른 남자가 말을 마치며 품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분홍 머리에 파란 눈, 카구라였다.



  “카구라!?!!”

  “아니 오늘 내내 없더니, 왜 거기 가 있는거야!!”

  긴토키와 신파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우릴 여기로 가라고 알려준 것도 그 아이라구. 너희한테 부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올 거라고 하더군.”



  신파치는 한숨을 내쉬며 왜 그런 일에 꼬인 거냐고 중얼거렸다. 긴토키는 잔뜩 긴장했던 몸을 풀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 그 아이라면 제 스스로 나올 겁니다. 철장이라도 부수고 나올거에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긴토키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말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맨 앞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코를 후비적거리며 나올 땐 자신이 집에 못 돌아가는 꼴 보고싶냐고 전하라고 했다. 다시는 자길 안 보고싶냐고 말이야.”




  그 남자의 말에 긴토키는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신파치는 긴토키를 불안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이대로 카구라를 냅둘거냐는 눈빛이었다. 그는 못내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끄응…. 요 계집애는 하루도 말썽피우는 날이 없단 말이야. 그렇지, 신파치?”

  “그러니까요. 천방지축이라구요.”



  긴토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신파치는 그런 긴토키의 모습을 보고 화색이 돌았다. 둘은 시선을 맞췄다. 약간의 눈빛이 오가더니 커다랗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의뢰비는 섭섭지 않게 줘야 합니다?”



  긴토키는 돈을 왕창 뜯어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파치도 옆에서 거들었다. 악덕 사채업자같은 모습에 마피아 조직원들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약속하지. 우리 조직원들을 무사히 빼낼 것을 의뢰한다. 물론 네 친구도.”




의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피아라니. 아무래도 좋았다. 카구라가 거기에 있으니까. 그들은 어떤 의뢰든 돈만 주면 해결하는 '해결사'니까.

“좋아. 가자, 신파치. 우리 애 혼 좀 내야겠다.”

“네! 긴토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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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후글쓴다 :

 

 

 

 

 

누님께 보내는 편지

은혼 심야 60분 전력 연성

WR.고은

 

 

 

 

  ‘누님께.

여전히 보고 싶은 누님.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잘 지냅니다. 감기도 걸리지 않고, 다친 곳도 없이 제가 맡은 일들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누님, 기억하시는지요. 저희가 에도로 떠난 그 날 말입니다.

그 날 밤, 사실은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누님의 얼굴을 이 눈에 담아두고 싶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누님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럼에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누님을 보게 되면, 영영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제가 우는 건 그 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로 얼마나 수 없이 많은 밤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누님이 걱정되고 생각날 때마다, 한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렀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면, 누님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누님이 행복하길, 언제나 바랐습니다. 제 자신의 행복보다도 더.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는 여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 못난 동생 때문에 망가진 것 같아 죄스럽습니다.

누님이 가시던 날, 그 죄스러운 마음이 기어이 눈물로 떨어졌습니다.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저는 아직도 어렸었나 봅니다.


하지만 누님을 위해 울었던 건 저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벌게진 눈을 보았을 때, 누님이 왜 그 사람을 마음에 두었던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을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밉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또 얼마나 많은 밤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이 곳은 언제나 그랬듯 시끄럽고 유쾌하며, 모두 각자가 맡은 일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누님이 좋아했던 그 정경 그대로.

가끔은 조금 허전합니다. 아니, 많이 허전합니다. 그 속에 누님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누님, 이제 그 곳에서는 행복하신지요?

누님께서 행복하다하시면, 그걸로 됐습니다.

오늘따라 더 보고 싶어집니다.

누님.

  소고 올림.‘

  

 

  미츠바의 묘, 그 묘단 위에 편지와 꽃다발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앞에는 검은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는 잠시 편지에 시선을 두었다. 소고가 왔다 간 모양이군. 히지카타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는 언제나 몸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는 라이터를 들고 담배 끝 언저리를 머뭇거리다 결국 불을 붙이지 않았다.

  “…소고는 걱정하지 마라.”



  그는 자신이 가져온 편지를 묘단 위에 살며시 두었다. 그리고는 묘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는 마치 무언으로 이야기 하듯, 그렇게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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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비타카긴] 은인

2016. 2. 23. 22:04 from 은혼





 은인

WR. 고은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비친다. 나뭇잎이며, 풀이며, 바위며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그 빛을 받아 반짝인다. 산 속 사이를 흐르는 냇물 소리는 청명했다. 새들의 지저귐은 평화로웠고,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활기를 띄웠다. 그들은 고기잡이 중인 듯 했다. 제각각 통발과 그물망을 들고 물속을 휘젓기를 몇 십분 째. 진이 빠진 아이 한 명이 잡힌 것이 있나 확인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긴토키는 물을 한번 내리치더니 볼멘소리를 했다.



  “여긴 없는 거 같은데, 이제 가자.”

  “가자고? 다른 곳으로?”

  “아니, 이만 돌아가자고!”

  돌아가자는 그의 말에 카츠라는 주눅이 들었다.



  “긴토키, 넌 조금 해보다가 안 되면 금방 포기하는 거냐? 의욕이라던가, 의지라고는 전혀 없군.”

  타카스기는 긴토키를 바라보며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뭐야? 그러는 본인은 한 마리라도 잡으셨나.”

  “여긴 깊이가 얕아서 그런 거다. 잡아봐야 송사리만한 것들인데. 난 좀 더 깊은 곳으로 갈 거야.”

  “더 깊은 곳으로 가면 잡힐 줄 아냐? 그러다 물에 빠져도 난 모른다?”

  “물에 빠지는 건 네 녀석이겠지. 누구처럼 수영을 못하진 않거든. 가지도, 해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 갈 수 있어. 너보다 큰 걸 잡아올 거야. 알겠냐?”



  타카스기의 도발에, 긴토키는 씩씩대며 앞장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 타카스기는 카츠라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한번 키득거리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이들은 계곡의 상류로 올라왔다. 그곳은 그들이 놀던 곳 보다 수심이 훨씬 깊어보였다. 큰 바위들이 계곡물 곳곳에 박혀있었고, 물살은 더욱 세었다. 긴토키는 뒤따라오던 두 아이들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의 움직이는 모습만 언뜻 보일 정도였다. 카츠라 근처에서 그물질을 하던 타카스기는 긴토키에게 신경이 쓰였다. 이곳은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떠밀려 내려가기 딱 좋았다. 재수가 없으면 바위에 부딪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자꾸만 안 좋은 예감이 들어, 타카스기는 조용히 긴토키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타카스기 녀석, 두고 보라지.”



  긴토키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그물을 쳤다. 그리고 슬슬 앞으로 나가면서 물고기들을 몰았다. 그러나 그 앞쪽은 급격하게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긴토키는 그대로 발을 내딛었다. 그는 몸부림 칠 새도 없이 물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위틈으로 언뜻 보이던 긴토키의 모습이 갑자기 없어지자, 그의 뒤를 쫓았던 타카스기의 표정 또한 없어졌다. 곧 불안과 두려움이 얼굴에 떠올랐다. 다급해진 그는 온몸으로 물살을 헤치며 긴토키가 있던 자리로 거슬러 올라갔다.

 

 

  긴토키는 잡고 있던 그물망대에 의지하며 수면 위로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물 속에서 아무리 발을 놀려도 소용없었다. 마치 그 발에 쇳덩이를 묶어놓은 것처럼 그는 가라앉고 있었다. 물이 코와 입에 쉴 새 없이 들어갔다. 숨을 쉬기도 벅찼다. 더 이상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긴토키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눈이 감기기 직전,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뭐지. 저것은 나를 죽음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인가. 아니, 저승사자라기엔 너무나 눈부시다. 그러면 저것은 나를 살리러 온 산신님인가. 아, 누구든 여기서 좀 구해줘.



  타카스기는 긴토키를 찾아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바로 보였다. 타카스기는 자꾸만 가라앉는 그를 재빨리 품에 안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계곡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타카스기는 긴토키를 뉘여 놓았다. 그리고 자신도 숨을 골랐다. 어째서 거기까지 간 건지. 조금은 위험하단 생각을 하고 다니란 말이야. 타카스기는 긴토키를 바라보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놈은 섞이면 섞일수록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간단 말이야.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대체 왜.

  말없이 긴토키를 보다가 타카스기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괜히 그를 자극시킨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고, 자신 때문에 눈을 뜨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은데도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자 타카스기는 더 초조해졌다. 그는 긴토키를 마구 흔들었다.



  “야! 일어나, 긴토키.”

  “…….”

  “정신차려, 바보자식아!”

  “푸하. 콜록콜록.”

  마침내 긴토키는 물을 토하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잔기침을 몇 번 했다. 진정이 된 후 그가 제일 처음 본 것은 타카스기의 얼굴이었다. 아, 내가 보았던 것은. 긴토키는 제 마음이 천천히 놓이는 것을 느꼈다.



  타카스기는 눈을 뜬 그를 보자 긴장이 풀렸다. 다행이었다.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한꺼번에 여러 감정이 들이치자, 그의 표정은 얼빠진 모습이 되었다. 긴토키는 제 몸을 붙잡고 있던 타카스기를 쳐다보았다.



  “누가 바보래냐.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네가 바보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주제에. 생명의 은인에게 그렇게 말해도 되냐?”

  “생명의 은인이 타카스기 너라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타카스기의 팔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타카스기의 몸이 긴토키 쪽으로 기울었다. 순간 둘의 거리가 꽤나 가까워졌다. 타카스기는 숨을 멈추었다. 긴토키의 숨이 낯설게 그를 간지럽혔다. 타카스기는 자신의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른 몸을 비틀어 긴토키와 떨어졌다. 그의 행동에 긴토키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나라면 뭐. 그 와중에 그물망은 안 놓치고 있더라. 뭐야?”

  민망함에 타카스기는 화제를 돌렸다. 그의 말에 긴토키는 제 시선을 그물망으로 옮겼다.

  “아아, 산신님이 내어준 손인줄 알았건만, 저거였구만.”

  “산신님?”

  되묻는 타카스기의 목소리를 듣고도, 긴토키는 혼자 웃음을 지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날 살려준 것은 산신님이구나. 타카스기와 똑 닮은. 분명, 살아서 저 바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마주보라고 한 것이리라.



  “아니다. 내려가자. 즈라는 어딜 두고 온 거냐.”

  “아, 맞다.”

  “바보 맞구만.”

  긴토키는 놀리듯 웃는 그 표정을 짓고서는 먼저 일어섰다. 타카스기는 뭐냐는 식으로 툴툴대더니 곧 따라 일어섰다.



  “아, 하나 빚졌다. 타카스기.”

  긴토키는 뒤돌아 타카스기에게 말하고는 발을 떼었다. 그 말을 들은 타카스기는 가만히 그 말을 곱씹었다. 빚졌다, 라. 가슴 속에 무언가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그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생겼다는 건가. 그게 뭐든, 그에게서 받는 거라면.

  타카스기도 긴토키를 뒤따랐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둘은 멀리 카츠라가 보이자 마구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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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후글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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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21. 15:21 from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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