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공백(上)

WR. 고은

 

 

 

 

“타카스기, 머리 좀 잘라주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조금 관리하기 힘들어졌거든, 요즘. 자꾸 엉키고 여기저기 걸리기도 하고.”

“흐음. 이리 와봐.”

 

갑자기 찾아와서는 가위를 들고 하는 소리가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늘 묶고 다니던 놈이 웬일로.



그가 내 곁을 지나 내 앞으로 와 앉는 사이, 주변 공기가 그의 향기에 젖어들었다. 언제 맡아도 좋은, 그립고도 설레는 향기.

그는 별다른 잔소리 없이 ‘아, 너무 짧게만 하지 말아주게.’ 하면서 가위를 건넨다.


 

“나한테 맡겨도 괜찮겠냐? 미리 말하는데 머리 자르는 거 처음이다.”

“괜찮다. 끝만 다듬어줘도 돼.”

 



순순히 제 뒷통수를 맡기는 걸 보면 나를 얼마나 믿는 걸까. 그것이 괜스레 안심되는 건 나도 그만큼 바보인걸까. 

빗질을 하는데 쓸어내리는 그 감촉이 좋다. 그래, 이것도 좋아했지. 여기에 파묻고 하루를 보내도 좋다 생각했었다.

 


 

“머리카락에 손을 댄 적은 거의 없지 않았나.”

“잘린 적은 있어도 직접 다듬겠다고 한 적은 없었지.”

“언제, 잘린 적이…. 아,”

“그래. 니조 그 자식 덕에 잘려봤지. 살인귀 니조라더니 변태 니조가 아니냐.”

“…”

“타카스기?”

 


 

서걱서걱, 머리 끄트머리를 자르면서 그의 머리가 짧았었던 때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니조, 그 남자를 부린 것도 결국 나였지. 그 때 그런 식으로 또 다시 끔찍한 이별을 만들어 버린 것도 나였다.

 


 

“타카스기? 무슨 생각하나?”

“어? 아.”

“지난 일 아닌가. 이제 괘념치 말게. 머리카락이야 계속 자라지 않는가. 그 때 이후로 이만큼 자라서 나는 자네한테 온 것이고.”


“누가 그렇대냐. 그냥 이 부분에서 어떻게 자르면 되나 고민했을 뿐이야.”

“말 돌리기는.”

 


한 때 그 예쁜 머리카락을 잘리게 한 내게, 이제는 길어졌으니 손질해달라는 너도, 나도 참 우습다. 목선을 드러냈던 머리칼이 허리 끝에 오기까지 우린 얼마나 많이 갈라지고 엇갈렸을까.

 

 

 

“다 되었는가?”

“으응. 이 정도면 대충.”

“대충이라니, 마음을 담았어야지. 그 때처럼 또 짧아졌으면 어쩔 건가?”

“…”

“호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뒤에서 움직이던 손이 멈추자 즈라는 근처에 있던 거울로 엉덩걸음을 쳤다. 요리조리 거울을 보더니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 웃는 낯을 녀석에겐 보이기 싫어, 얼른 고개를 내리고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쓸어 모았다. 그것들을 가위와 함께 옆으로 치워두려는데.

 

 

“어? 어어?”




--- 다음 편에 계속.

Posted by 은후글쓴다 :





좋아했던 애가 전혀 몰랐던 사이에 여자친구와 다정한 셀카를 찍어 올렸다.

 

 

 

 

WR. 고은

 

 

 

 

[오늘부터... 우리는♡]

 

 

“이것 좀 보게, 긴토키.”

“뭘.”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내가 타카스기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말이야. 근데 이게 대체 무엇인가!”

“뭐긴, 그거네 그거. 우리 오늘부터 사귑니다~ 잘 봐주세요~ 특히 너, 이걸 보고 있는 너. 우리 잘 어울리죠?”

“대체 어느 순간부터? 어디서? 어떻게? 왜 만나는 거야? 왜 타카스기 군,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었지? 왜 나는 하나도 몰랐던 거야? 이 여자애 누구야? 긴짱 알고 있어? 타카스기 군, 이제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겠다는 거야?”

“내가 알겠냐! 왜 갑자기 사춘기 여고생 모드?”

“이제 어쩌면 좋지? 히잉….”

 

 


카츠라는 잔뜩 죽은 얼굴을 테이블 위로 떨구어버렸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또 핸드폰을 켰다. 턱은 테이블에 그대로 박아둔 채 계속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오~ 드디어’, ‘ㅊㅊ’, ‘잘 어울린다!’ 따위의 댓글들이 가득했다. 이 패턴이 반복되기를 십 여분 째. 카츠라는 이제 원망 섞인 목소리였다.

 


 

“타카스기 자식,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거야? 왜 너도나도 다 축하해 주는 거냐고!! 절대로 용서 못해. 축하 따위 절대 못한다고!!!”

“‘군’에서 언제 ‘자식’으로 바뀌었대. 대체 네가 용서 못하면 어쩔 건데. 애초에, 타카스기 얘가 너한테 관심이라도 줬냐? 관계 발전의 건더기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있, 있었…. 있었을지도 몰라!!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안 날 뿐이야. 있었지 않았을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있어. 있어야해. 있어줘라. 있니? 있…”

 

 

 

과거회상에 갇혀버린 카츠라의 모습에 긴토키는 웃음이 났다.

“안쓰러워서 못 봐주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포기해.”

“포기라니!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직접 물어보기라도 할 거야?”

“으으. 조, 좋아. 직접 물어볼 거야. 이 귀로 똑똑히 들을 거라고. 긴토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제대로 대답 듣고 올 테니까.”

“흐응, 그러시던지. 근데 말야. 네가 원하는 대답 못 듣고 오면, 이번엔 내가 물어볼 거다, 너한테.”

 

 

 

카츠라는 긴토키에게 두 눈 도장을 쾅 찍고서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긴토키가 했던 말을 듣고는 나간 건지, 확인할 새도 없이 자리를 떴다. 뭐가 그렇게 급하기에 달려나가는 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그는 중얼거렸다. 


긴토키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카츠라를 좇았다. 아니, 만날 때부터 봤던 그를 시선 한번 거두지 않고 계속 좇았다. 오자마자 시켰던 딸기 파르페가 처음 그대로 녹아가고 있었던 것도 모를 만큼 중요한 것처럼.






---

Posted by 은후글쓴다 :

[긴츠라] 수박 사 주세요.

2016. 6. 19. 23:25 from 은혼

 

 

 

 

수박 사 주세요.

즈라른 전력 60분 연성

WR.고은

 

 

 

 

 “긴토키, 수박 먹고 싶다.”

 “어.”

 “시원한 수박 먹고 싶어.”

 “응.”

 “수박 먹고 싶어.”

 “어.”

 “수, 박.”

 “으아아아악! 저리 떨어져!”

 카츠라가 희번뜩해진 눈으로 긴토키에게 매달리자 긴토키는 질색을 하며 카츠라의 팔을 떼어놓았다.

 “더워…. 긴토키, 수박.”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온 구멍에서 땀이 나오는 날씨였다. 내리쬐는 햇빛에 살갗은 타들어갈 것 같았다. 바람이라도 차게 불면 좋으련만, 아니면 차라리 불지나 말지. 야속하게 그것마저 뜨거운 온도를 실어 날랐다.


 카츠라는 내내 부동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렇게 있으면 시원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그 옆에서 긴토키는 퍼질러 누워있었다. 손가락조차 까딱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더위는 누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고갤 돌려보니 카츠라는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 그러면서 수박타령을 하는 것이었다. 수박귀신이 들린 것 마냥 징징대는 소리에 긴토키는 이제 귀에 수박이 자라날 판이었다.

 

 

 “그렇게도 먹고 싶으면 니가 사와!”

 “그렇지만, 응? 밖은 덥기도 하고, 이대로 나가면 곧바로 증발해버릴 것 같고, 그도 아니면 아스팔트 위에 구워진 고기마냥 될 것 같단 말일세. 그런데도 날 내보낼 셈인건가? 아, 나 같은 거, 귀찮구나. 더운 날 고작 그 수박 하나가 뭐 그리 어렵다고 나를 사지로 내몰려는 거지? 알겠어. 갈게. 이 문 밖을 나서서 그대로 황천길로 가면 되는 거지? 하아.”

 카츠라는 퀭한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긴토키를 쳐다보았다. 긴토키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카츠라를 내려다보았다.



 “황천길 같은 소리. 안 그래도 더운데 귀찮게 시리. 간다, 가. 너도 따라 와.”

 “에? 나? 왜 나? 싫은데요. 저는 죽고 싶지 않은데요. 긴토키씨가 갔다 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카츠라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자긴 절대 밖으로 안 나가겠다는 심보였다. 눈이 뒤집혔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긴토키가 그랬다. 실성한 건지 이성이 날아가버린 건지 아니면 굉장히 화라도 난 건지, 어찌 되었든 카츠라는 제가 실수했다는 걸 구구절절 느꼈다. 긴토키는 카츠라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카츠라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렇단 말이지.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내 짜증 다 받아주겠단 얘기지? 더위를 먹어도 단단히 먹었구나. 그렇지, 이열치열 알지? 실내 온도랑 체내 온도 똑같게 해줘? 더위 먹고 하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주랴? 어? 이런저런 것들 다 감당 할 수 있단 거지? 평소하고 전혀 다른 자세로 임하겠다는 거잖아, 지금 얘기?”

 

 

 카츠라는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날이 더우니까 나는 땀이겠지? 그럴 거야. 그렇지 않을까? 카츠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아등거렸다. 그놈 참, 힘은 또 왜 그렇게 센지. 미동도 없었다.



 “저, 저기 긴토키.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하하, 일단 진정하고 앉아서 얘기해볼까?”

 “진정? 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얘기겠죠? 네, 원하신다면야 지금 당장이라도.”

 “기, 긴토키!”

 

.

.

.


 “긴토키, 이따가는 꼭 사주는 거지?”

 “으이구, 수박귀신아.”









---

Posted by 은후글쓴다 :